[천주교 세례명]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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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t.FRANCIS of Assisi
San Francesco d'Assisi Patrono d'Italia 

성인 성인 프란치스코 (Francis)
축일 10월 4일 활동년도 1181/1182?-1226년
신분 부제,설립자 지역 아시시(Assisi)
같은 이름

방지거,프란체스꼬,프란체스꾸스,프란체스코,프란체스쿠스,프란치스꼬,프란치스꾸스,프란치스쿠스,프랜시스

 

이탈리아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성당 (성 프란치스코 무덤) 방문기 https://simjuliana.tistory.com/502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done)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이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1202년에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내 교회를 고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옛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는 버려진 옛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고,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3년 후인 1210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가 극도의 가난을 살려는 그와 11명의 동료들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1212년에 그는 성녀 클라라(Clara)와 함께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때 그는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레크 알 카멜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결국 사라센 선교가 실패로 끝난 줄 알고 성지를 방문한 뒤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승인을 받았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면서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병세가 깊어지자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죽음의 다가온 것을 알자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2년 후인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프란치스코 대성전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코 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