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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가톨릭 상식

[천주교 세례명] 아녜스 축일 1월 21일


 

 

축일 1월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St. Agnes of Rome 

Sant’ Agnese Vergine e martire 


동정녀이고 순교자이며 ‘어린양’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그녀는 부유하고 귀족인 한 로마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아름다운 아녜스에게 많은 구혼자들이 나타나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거절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녀는 천상의 정배(定配)이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녀는 우상의 신들 앞에 불려나와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녀가 우상 신들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거부하자, 집정관이 베스타 신전(神殿)에서 봉사하는 신전 정녀(貞女)가 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집정관은 그녀의 옷을 벗기어 그녀를 창녀촌으로 보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의 긴 머리가 빨리 자라나 그녀의 벗은 몸을 가려주고 그녀를 보호했다고 한다.
 
한번은 집정관의 아들이 그녀를 폭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집정관은 아들은 눈 먼 장님이 되고 만다. 
그때 그녀는 기도를 하여서 그 아들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마침내 그녀에게 화형(火刑)의 선고가 내려진다.
어느 자료에서는 그녀는 목 베임을 순교를 했다고 전하여진다. 
이윽고 그녀는 도미티안 스타디움으로 불려나오고, 순결한 그녀의 몸과 영혼을 정배이신 그리스도께로 바친다. 
그 도미티안 스타디움(Stadium of Domitian)이 지금의 노바나 광장(Piazza Novana)인데, 오늘날 그곳에는 성녀 아녜스 성당이 있다.
 
그녀에 대하여 전해지는 자료나 이야기들은 전설이 아니다. 
많은 입증할만한 자료들이 있다. 
순교 후 머지않아 그녀는 칭송받기 시작했다.
4세기 말에 교황 다마소 1세가 그녀의 묘비에 비문을 썼는데, 그것이 1792년의 발굴 때에 드러나기도 하였다. 
교황 다마소 1세의 비서를 3년간이나 역임했던 성 예로니모(340-420)는 그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성녀 아녜스는 문학, 사람들의 연설, 특별히 교회에서 칭송을 받는데, 그녀는 나이와 폭군을 둘 다 이기어 냈으며, 아울러 자신을 순결한 순교자로 하느님께 봉헌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과 머리로 추정되는 유해가 1901년과 그 이듬해에 각각 발견되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머물러 계속되는 상징과 칭송의 강력한 초점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순교할 당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칼로 나의 몸을 피로 물들게 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께 바친 나를 결코 더럽게 할 수는 없다.”

 


 


 

축일 3
월2일 (3월6일)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 동정

St. AGNES of Prague

St. Agnes of Bohemia

Santa Agnese di Boemia (o di Praga) Monaca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는 보헤미아 혹은 프라하(Prague)의 성녀 아녜스로 불리는 그녀를 '나의 반쪽'이라고 불렀다. 

성녀 아녜스는 성 벤체슬라우스(Wenceslaus, 9월 28일)의 후손으로 

부친의 이름은 1197년에 보헤미아의 왕좌에 오른 오토카르 1세(Ottokar I)이다. 

또 헝가리의 성녀 엘레사벳(Elisabeth, 11월 17일)과는 사촌간이다. 

성녀 아녜스는 불과 세살 때에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인 하인리히의 아들인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약혼하고, 

약혼자의 어머니가 세운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6세 때에 약혼자가 죽음으로써 보헤미아로 돌아왔고, 

9세 때에는 프레데릭 황제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하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독일어와 그곳의 풍습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성녀 아녜스는 늘 하느님께 굳은 신앙을 표현하고자 애썼으며, 자기 혼자서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며 덕을 닦았다. 

그녀는 차츰 나이가 들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동정생활을 갈구하면서 일이 꼭 그렇게 되도록 기도한 결과, 

또다시 파혼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다시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더욱 열렬히 기도하고 고행하며 화려한 궁중 의상 밑에 고행복을 입고 지냈다. 

그녀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맨발로 성당을 다녀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28세의 미모의 여성이 되었다. 

온갖 청혼을 물리친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그 결과 결혼에서 자유롭게 된 그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1236년에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정신의 올바른 계승자로 살았다. 

비록 공주 출신이었지만 수녀원의 하찮은 일까지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다가 7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녀는 187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