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성인 라자로 축일 12월17일 (병원 수호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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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성인 라자로 축일 12월17일 (병원 수호성인)

 

성인 라자로

St. Lazarus

San Lazzaro di Betania 

병원의 수호성인
 

성인 성인 라자로 (Lazarus)
축일 12월 17일 활동년도 +1세기경
신분 신약인물,예수의제자,주교 지역 마르세유(Marseilles)
같은 이름

나자로,나자루스,라자루스

 

요한 복음 11장에 의하면 성 라자루스(또는 라자로)는 예루살렘 부근 베타니아에 살던 성녀 마르타(Martha, 7월 29일)와 성녀 마리아(Maria)의 오빠로서 예수님의 친구였고, 4일 동안 무덤에 있다가 예수에 의하여 죽음에서 살아났다. 또 요한 복음 12장 1-11절에는 베타니아의 저녁식사 때에도 참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성 라자루스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7월 22일), 성녀 마르타, 막시무스(Maximus) 및 다른 사람들이 노 없는 배를 타고 표류하다가 남서부 프랑스 지방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며 마침내 마르세유의 첫 주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여동생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기적적으로 키프로스(Cyprus)에 도착하여, 키티온(Kition) 또는 라마카(Lamaka)의 주교로서 30년을 전교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해지는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성 라자루스와 그의 누이들은 시리아로 갔고, 그의 유해는 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이장되었으며 많은 성당들이 그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라자로의 부활-카렐 파브리티우스라자로의 부활-카렐 파브리티우스 1642년경. 210.5×140㎝. 바르샤바 국립미술관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님 부활의 한 예형으로 간주되어서 기원 후 3세기부터 화가들에 의하여 

꾸준히 다루어진 주제 중에 하나이다.

이 주제를 다룬 대표적인 몇몇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면 

로스엔젤레스의 카운티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라자로의 부활〉,

메시나 국립 미술관에 있는 카라바조의〈라자로의 부활〉, 

런던 국립 미술관에 있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라자로의 부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트겐 신트 얀스의 〈라자로의 부활〉,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파브리티우스의〈라자로의 부활〉이 있다.

 

이 그림의 주제인 라자로의 부활은 죽은 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기록한 요한 복음 11장 1-27절의 말씀이다.

위의 그림을 보면 렘브란트 그림의 구성과 거의 비슷하지만 파브리티우스의 작품은 등장 인물이 훨씬 많다.

동굴 무덤의 배경을 어둡게 처리하였고 재미있는 것은 라자로가 누운 석관(石棺)의 뚜껑 위에 

긴 옷을 입은 예수님이 맨발로 올라 서 있는 모습이다.

 

사실은 라자로의 발치에 서 있던 예수님을 작가는 존경의 표시로 석관 위에 배치하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부활 기적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깨우는 이와 깨어난 이가 세로 축을 이루게 하였고, 

예수님께서 치켜올린 팔의 명령을 좇아서 라자로가 상체를 일으킨다.

죽은 자가 눈이 떠있는 모습도 보인다.

 

렘브란트는 라자로가 예수님 말씀의 힘에 의하여 깨어나는 장면을 그렸다면

파브리티우스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영토에 던져 넣은 생명의 빛에서 

라자로가 기운을 얻어 깨어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죽은 라자로가 눈이 열리는 순간에 석관을 에워싼 구경꾼들의 놀람과 동요의 몸짓과 감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의 외침과 손짓에 라자로는 깨어났다.

어두운 동굴 무덤 한 복판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손짓 하나로 죽음에서 삶을 건져 올리는 기적은

라자로가 나흘 간의 어둠을 털어 내고 죽음에서 깨어나는 감동적인 장면인 것이다.

이 그림은 인간은 제 힘으로 관 뚜껑을 열 수 없으며, 

주님의 도움 없이 죽은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교훈을 주는 종교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