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에우제니아 축일 3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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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에우제니아 축일 3월10일

Mother Marie Eugenie

 

성인 성녀 마리아 에우제니아 (Mary Eugenia)
축일 3월 10일 활동년도 1817-1898년
신분 수녀,설립자 지역
같은 이름

메리,미리암,에우게니아,유진

 

 성녀 안나 마리아 에우게니아(Anna Maria Eugenia, 또는 마리아 에우제니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완전히 패배한 후 군주제가 회복된 1817년 프랑스 메스(Metz)의 경제적으로 부유한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Paris) 북쪽 교외의 한 성(城)에서 성장하였다. 그녀의 출생 배경은 그녀가 장차 프랑스 교회 전체에 새로운 영성적 길을 제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볼테르(Voltaire)와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정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을 통해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풍부한 감수성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강한 의무감을 일깨워주었다. 가정생활을 통해 그녀는 지적 호기심과 낭만적인 정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폭 넓은 세계관을 키워갈 수 있었다.

   뒤늦게 세례성사를 받은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축일 날 성당 미사 중에 별다른 마음의 준비도 없이 관행처럼 첫영성체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첫영성체는 미래의 비밀을 예언하는 놀라운 신비의 체험이었다. 그녀는 훨씬 뒤에 자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완전히 돌아서기 전까지는 그 예언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청소년기는 행복했지만 전혀 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오빠와 젖먹이 여동생의 죽음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고, 허약한 건강 상태와 말에서 떨어진 일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힘든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배워 알고 있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가 13살이 되었을 때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모든 재산과 부동산을 잃었다. 게다가 여러 오해로 인해 부모님이 이혼하자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리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마리아 에우게니아 역시 종종 어머니를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가정을 방문하곤 하였다.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아 15살 때 그녀는 어머니를 콜레라로 잃고 말았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세속적이고 천박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세속적인 즐거움과 경건한 삶의 좁은 길 사이에서 흔들렸다. 괴로움 중에 진리를 찾으며 때로는 절망하기도 한 그녀는 마침내 절대자에 대한 회개의 갈증을 느끼고 초월자에게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19살 때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주교좌성당의 사순절 특강에 참석했다가 이미 설교자로서 그 재능이 잘 알려진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의 젊은 수도원장인 앙리 라코르데르(Henri Lacordaire)의 강론을 듣게 되었다. 라코르데르는 세상이란 특별한 장소에서 교회의 쇄신에 관한 환시를 본 라므네(Lamennais)의 제자였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했고 이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의 의문과 갈망, 이상주의, 그리스도와 교회 모두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강론 말씀은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가슴을 울렸고, 이를 통해 그녀는 그동안의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동시에 수도 성소에 대한 소망이 일었다. 그녀는 완전한 회개를 경험했고, 그 순간 이후 자신의 모든 정신과 나약함까지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순간에 그녀는 라므네의 또 다른 제자인 콩발로(Combalot) 수도원장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콩발로 신부는 그녀와의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꿈꾸어 왔던 수도회의 설립자로 예정된 한 선택된 영혼과 만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자신의 사업을 맡아주길 설득하며, 하느님께서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기 위해 그녀를 선택하셨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만들어 당대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콩발로 수도원장 신부의 인도를 받기 시작했다. 22살의 나이에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승천 수도회의 설립자가 되어 수도자들의 전 생애를 성화하기 위해 헌신하며 그들과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1839년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다른 두 명의 젊은 여성들과 함께 파리의 생 쉴피스(Saint-Sulpice) 성당 근처 페루(Ferou) 길에 있는 한 공동주택에서 기도와 연학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41년에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부인과 앙리 라코르데르 수도원장, 몽탈랑베르(Montalembert) 같은 여러 지인들의 보호와 후원 속에 수도회의 첫 번째 학교를 개교하였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네 나라 출신의 16명의 수녀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성장했다. 그들은 옛 것과 새 것을 연결하기를 원했다. 즉 오랜 역사 안에 쌓여 있는 교회의 영성적 보화와 수도생활의 지혜를 현대인들의 요구에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교육과 결합하고자 했다. 이는 그 시대의 가치를 반영하는 문제였으며, 동시에 복음적 가치가 새로운 산업화와 과학의 시대에 부상하는 문화를 관통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강생의 신비에 중심을 둔 수도회의 영성은 깊은 관상과 사도직 활동에 헌신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찾아 나서도록 주어진 삶이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생애에 대해서는 19세기 내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열렬히 사랑했고, 이를 수도회 역사의 활기 있는 한 부분으로 삼았다. 계속해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미래의 선물과 수녀회의 확장에 쏟아 부었고, 그것은 그녀의 평생의 사업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많은 수녀와 친구들을 보내주셨다. 초창기 회원 중 한 명인 테레사 엠마누엘(Teresia Emmanuel)은 아일랜드 출신의 신비가로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엠마누엘 달종(Emmanuel d’Alzon) 신부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성모 승천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이 두 설립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로를 도와주었다. 또한 이 두 설립자는 우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감을 준 많은 평신도 협력자들이 수도회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고 노동하며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성모 승천의 길로 이끌며 많은 이들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자리 잡았다.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1888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예수의 마리아 에우게니아 원장수녀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침묵과 겸손으로 지냈다. 그녀의 생애는 완전히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삶이었다. 1898년 3월 9일과 10일 오늘날의 파리에 속한 오퇴이유(Auteuil)에서 임종을 앞두고 노자성체를 받아 모신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온화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돌아갔다. 그녀는 1975년 2월 9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