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축일 8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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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축일 8월15일

성인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Santo Stanislao Kostka 
St. Stanislaus Kostka
 

성인 성인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Stanislaus Kostka)
축일 8월 15일 활동년도 1550-1568년
신분 신비가 지역 폴란드(Poland)
같은 이름

스따니쓸라우스,스타니슬라우스,쓰따니쓸라오,코스트가

 

그는 폴란드의 마조비아에 있는 로스트코바 가문 출신으로 대략 1550년 중반에 태어난 폴란드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크록짐의 영주였고 국가회의 의장이었다. 

비록 스타니슬라오가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의 부모는 주의를 기울이며 

그를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시켰고 모든 사치와 자기관용으로부터 멀리 하게 하였다.
 

스타니슬라오가 14살이 되던 1564년에 그의 아버지는 그와 그의 형인 폴을 당시에 특히 귀족들을 위해 문을 막 열었던 

빈의 예수회 대학에 입학시켰다. 처음 일곱 달 동안 그 두 형제는 학교 옆에 숙소를 마련해 살았다. 

그러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그 건물을 회수해서 셋방을 구했다. 

1565년 3월에 항상 안락함을 찾던 폴은 킴버커 의장 댁의 방들을 빌렸고 코스트카 형제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스타니슬라오는 인문학 과정을 밟았고 성녀 바르바라에 대한 많은 신심이 있었다. 

신중하고 조용한 성격의 그는 모든 불필요한 손님과의 접촉을 피하고 공부에 열중했으며 검소한 의복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성찰로 보냈으므로 폴은 그를 예수회원이라고 비꼬아 놀렸다.

이제 그들은 의장의 집에 있게 되었고 더 이상 예수회원들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지 않게 되었다. 

교만하고 잘난 척하는 폴은 스타니슬라오의 천성적인 공손함과 겸손함을 

폴 자신의 세속적이고 행복한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로 해석했다. 그 결과 폴은 동생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스타니슬라오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불쾌감과 분노를 주었고 폴은 그를 때리고, 발로 차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앙갚음하였다. 

동생에 대한 폴의 부당한 처사는 18개월간 지속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스타니슬라오의 확신을 깨는 대신에 덕행의 시험으로서 그를 강하게 하고 예수회원이 되도록 격려했음에 틀림없다.
 

1565년 12월 중순에 스타니슬라오는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중태에 빠졌고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병의 심각성 때문에 그는 병자성사를 청했으나 폴은 그의 병세가 심하지 않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사실 이를 연기한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킴버커 의장 댁이 독실한 루터교 집안이라서 

병자성사를 주러 사제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거룩한 성체 안의 주님을 모시려는 열망으로 불타오른 스타니슬라오는 폴이 사제를 불러주지 않을 것을 깨닫고 

그의 신심의 수호자인 성녀 바르바라에게 죽기 전에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겸손한 기도는 가장 인상적인 방식으로 응답 받았는데 바로 성녀 바르바라와 두 천사가 성체를 모시고 그의 방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 방문의 위로가 지나가자 성모님께서 팔에 아기예수를 안고 스타니슬라오를 찾아오셨고 

어머니처럼 성인의 팔에 예수님을 건네주시면서 그가 예수회에 입회할 것임을 알려주셨다. 

이 신비스러운 은혜 뒤에 스타니슬라오는 회복되었고 다시 대학을 다녔다.


 

그는 빈의 예수회 관구에 입회에 대하여 문의하였고 관구에서도 받아들이고 싶어 했지만 

그가 먼저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미성년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타니슬라오는 부모가 자신이 예수회원이 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어려운 처지를 다른 예수회원에게 전했고 

그는 스타니슬라오에게 아우구스부르크로 가서 독일 관구의 베드로 카니시우스 신부에게 입회 허가를 요청할 것을 제안했다. 

이제 확신에 찬 스타니슬라오를 낙담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567년 8월 10일 아침, 그는 조용히 빈을 떠나 그 즉시 도시 외곽에서 순례자의 허름한 차림새를 하고 아우구스부르크로 향했다.

동생의 성공적인 탈출에 분노한 형 폴은 성인을 뒤쫓았다. 

그가 동생을 따라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례자 차림의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쳤고 그는 동생이 다른 길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아우구스부르크를 향하여 450마일을 걸은 스타니슬라오는 

딜링엔을 방문 중인 카니시우스 신부를 만나기 위해 다시 여행을 했다. 

신념에 찬 스타니슬라오가 그 관구장을 만났을 때,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빈의 예수회원이 자신을 위해 써준 소개장을 주었다. 

스타니슬라오는 그의 신심을 단번에 알아보고 예수회 입회를 허락한 베드로 카니시우스에게 마음을 열었다. 

스타니슬라오가 아직 폴란드에 매우 가까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력이 독일까지 미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카니시우스 신부는 곧 로마로 가려고 했던 두 예수회원과 같이 가도록 조정했다. 

그러나 출발하는 날까지 그는 딜링엔의 성 예로니모 학교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어린 귀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돌봐주었다. 

9월 하순에 스타니슬라오와 두 동료들은 험한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가는 긴 여정을 떠났고 10월 25일에 도착했다.


여행을 무사히 마친 세 명의 예수회원들은 총장인 프란시스 보르지아 신부가 있는 곳으로 갔고 

성인은 그에게 카니시우스 신부가 써준 소개장을 주었다. 

보르지아 신부가 다음과 같은 스타니슬라오에 대한 소개장을 읽었다. 

“그는 폴란드 귀족이고 이름은 스타니슬라오입니다. 그는 훌륭하고 지적인 청년으로서... 그는 이곳에 도착하여 그의 항구한 

열망을 이루는 데에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몇 년 전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갖고 예수회 입회를 지원했었습니다. 

비록 아직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는 가족의 방해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로마로 보내지는 것을 대단히 원했습니다. 

또한 영신적으로 많이 진보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저희는 그가 훌륭한 일들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 새로운 수련자는 게슈 지역 예수회에서 3개월 가량 보냈고 그런 다음 1568년 초에 로마 대학에서의 한 달을 거쳐 

성 안드레아 수련원에서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 

스타니슬라오의 수련기는 단지 10개월에 그쳤지만 그 기간 동안 그의 기도는 순수해졌고 하느님과의 결합은 확고해졌다.

 1568년 8월 초, 스타니슬라오는 8월 15일에 죽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8월 10일에 열이 나서 시달렸지만 그의 상태가 특별히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8월 14일에 그는 자신을 돌보는 또 다른 수련자에게 내일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수련자는 스타니슬라오가 심각하게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흘려들어 버렸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그는 갑자기 악화되었고 모든 힘을 잃은 듯 보였다. 

그 수련자는 스타니슬라오가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 봉헌될 방에서 동료들과 함께 그가 받을 병자성사를 준비했다. 

그는 병자성사를 받고 난 다음에 밤이 되어 모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동료들과 즐겁게 대화했다. 

예수회원들이 떠나간 뒤에 스타니슬라오는 기도를 하고

 “저의 마음은 준비되었습니다. 오 주여! 저의 마음은 준비되었습니다.” 라고 찬송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다음날 아침까지 그 바닥 위에 남아있기를 청했다. 

새벽 3시 무렵, 그는 기도를 멈췄고 큰 기쁨에 의해 환해진 얼굴로 성모님께서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오고 계신다고 가리키면서 방 안의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18살의 스타니스라오는 순명과 사랑으로 순수한 영혼을 주님께 봉헌하였다. 

때는 1568년 8월 15일로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스타니슬라오는 예수회 성당 오른편에 묻혔으나 지금은 그 유해가 로마에 새로 지은 성 안드레아 델 퀴리날레 성당의 기념 제단 밑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