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축일 9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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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축일 9월20일

 

언니 김효임 골롬바, 동생 김효주 아녜스

 

성녀 김효임 골롬바와 김효주 아녜스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마을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는 6남매의 자녀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한 신자생활을 하였다.

아녜스는 성교회에 입교한지 오래지 않아 벌써 탁월한 모범을 보이더니, 언니 콜룸바(Columba)와 동생 클라라와 함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고 아름다운 덕을 쌓았다.

이들 자매는 모친을 잃은 뒤에는 서울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용머리 마을의 오빠 집에서 살고 있었다.

 

기해년(1839) 53일 포졸들이 서울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김 안토니우스(Antonius)의 집을 포위했으나,

그들이 올 것을 눈치 챈 안토니우스는 가족을 데리고 피신한 후였고,

그의 집에는 효주 아녜스와 효임 콜룸바 그리고 세 살 된 어린아이만 남아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장은 효주 아녜스 자매를 어르기도 하고 별별 약속을 다하며 배교시키려 하였으나 얻은 것은 거절뿐이었다.

이에 포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니 효주 아녜스는 93일에 순교한 6명의 신자 중에서 가장 악독하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신자들은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 포졸들과 관원들이 분통을 터트리기도 하였지만,

효주 아녜스는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침묵 속에서 기도를 드리며 마음속으로 우리 구세주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포장은 이와 같이 훌륭한 항구심이 어떤 마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하여 등에 몇 가지 주문을 쓰게 하고,

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그 글자들을 열세 군데나 뚫게 하였지만, 이러한 형벌에도 그녀는 전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 포졸들은 효주 아녜스를 끄집어내어 학춤형을 가하며 온갖 비웃음과 욕설을 퍼부었지만,

효주 아녜스는 용기를 내어 그 괴로움을 달게 참으며 굳게 마음을 가졌고, 더욱더 열심히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 바치며 묵묵히 참아 받았다.

이러한 형벌을 가한 후, 포장은 옷을 벗긴 채로 그녀를 죄수들의 감방에 들여보내 갖은 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정녀들의 천상배필이 그녀를 구원하러 오셔서 초인적인 힘을 넣어주어 한 사람이 남자 열 사람을 능가할 만큼 힘을 강하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눌려 마침내는 옷을 돌려주고 그녀를 여자 감방으로 데려갔다.

 

59일 효주 아녜스는 언니인 효임 콜룸바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고, 512일에는 형조판서 앞에 출두해서 그동안 감옥에서

당한 여자로서의 모욕을 호소하자, 형조판서는 이 같은 처사를 저지른 포장과 포졸들을 처벌하였다.

그 다음부터 여교우들은 악형보다도 더 괴로운 그와 같은 모욕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효주 아녜스는 언니 효임 콜룸바보다 먼저 순교의 칼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3993일이요 나이는 24세였다. 그녀는 19257 5일 교황 비오 11(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