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모방 베드로 신부 축일 9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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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모방 베드로 신부 축일 9월20일

성인 모방 베드로

Saint Pierre Philibert Maubant, Priest
 

성인 성인 모방 베드로 (Manbant Peter)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03-1839년
신분 신부, 지역 한국(Korea)
같은 이름

나백다록,베드루스,페드로,페트로,페트루스,피에르,피터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9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5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Barthélémy Bruguière)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Barthélémy Bruguière)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guiére, 한국성 소())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1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 곳 내지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12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듬해 115일 샤스탕(Chastan, )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75일 교황 비오 11(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