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요나 축일 9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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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요나 축일 9월20일

 

성인 요나
 

성인 성인 요나 (Jonas)
축일 9월 21일 활동년도
신분 구약인물,예언자 지역
같은 이름

요나스,조나스

구약성서 열두 소예언서 중 다섯 번째 자리에 배치된 요나서는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른 예언서들과 매우 다르다. 예언서는 일반적으로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으로 이루어지는데, 요나서에는 전기나 자서전적인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 비중이 미미하다. 그리고 요나서는 요나라는 이름을 지닌 예언자가 한 가지 사명을 수행하는 이야기만 전한다. 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말은 고작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지금의 이라크에 있음)는 무너진다!”라는 한마디이다(3,4).

   요나서에 의하면 요나 예언자는 주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 반대쪽으로, 당시 사람들이 세상 서쪽 끝이라고 생각하던 다르싯으로 달아나려고 배를 탄다. 주님은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키신다. 뱃사람들은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재앙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모든 것이 소용없자 그들은 변고의 원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주사위를 던진다. 배 밑창에서 잠을 자다가 끌려 나온 요나에게 주사위가 떨어진다. 그는 자기에게 모든 탓이 있음을 순순히 고백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권고한다. 선원들은 뭍으로 돌아가려고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태는 나아지지 않는다. 그들은 마침내 주님에게 용서를 청하며 요나의 말대로 한다. 그러자 바다가 조용해진다. 사람들은 주님 곧 요나의 하느님에게 희생 제물을 바친다. 주님은 큰 물고기를 시켜 바다에 떨어진 요나를 삼키게 하신다. 사흘 뒤에 그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는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에 하느님께 감사의 시편을 노래한다.



   이렇게 주님은 요나를 살려내신 다음 처음과 똑같이 사명을 부여하신다. 이번에는 요나도 주님의 지시를 순순히 따른다. 니느웨로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 하고 외친다. 그러자 니느웨의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주님이 나서서 참회하며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한다.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은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신다.

   요나는 이러한 하느님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과 그러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나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다. 요나는 주님이 자비하신 하느님이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느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일이 벌어지자, 화를 내며 자기를 차라리 죽여 달라면서 하느님께 대든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고 성밖으로 가서 초막을 치고 앉는다. 주님은 그 위로 아주까리를 자라게 하시어 그늘을 드리워 주신다. 그래서 요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는데, 이튿날 벌레가 아주까리를 쏠아 시들게 한데다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뜨거운 바람까지 불자, 다시 죽는 게 낫다고 하느님께 투덜거린다. 그러한 요나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너는 그토록 가엾이 여기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서는 하느님의 이 질문과 함께 끝난다.

   요나서의 문제는 하느님의 예언자인 요나가 뱃사람들, 특히 니느웨인들로 대표되는 이민족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예언서는 관습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벗어 던지기를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좁은 안목을 버리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대양과 해심과 니느웨처럼 전망을 넓혀 세상과 하느님을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 과거와는 다른 시각으로, 곧 바다와 물을 창조하시고(1,9) 이민족들의 하느님도 되시는(3,8 참조) 한결같으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정의를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따른 보편적 구원을 이 세상에 구현하는 사명을 수행하라고 그분의 백성을 부른다. 이렇게 볼 때 요나서는 독특한 의미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예언서로서 다른 예언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