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브루노 축일 10월6일 (봉쇄수도회 카르투시오회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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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브루노 축일 10월6일 (봉쇄수도회 카르투시오회 설립자)

성인 브루노

ST.BRUNO

San Bruno (Brunone) Sacerdote e monaco

 

관상 수도회 (봉쇄수도회) 카르투시오회 설립자

 


 

성인 성인 브루노 (Bruno)
축일 10월 6일 활동년도 1030?-1101년
신분 신부,설립자 지역 쾰른
같은 이름

 

봉쇄수도회인 '카르투시오회 Ordo Cartusiensis'를 1804년 프랑스에 설립한 성인 브루노 

우리에게 카르투시오회가 익숙한 것은

2005년 필립 그로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으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으며 (국내 개봉은 2009년)

 

 

이후 15년뒤 KBS 3부작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 - 카르투시오 봉쇄수도회>으로 경북 상주에 있는

아시아 유일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올해 11월에는 <봉쇄수도회 카르투시오>로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1130(1035)경 쾰른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교육받은 후 1055 년에 사제품을 받고 신학을 가르쳤다.

부패한 성직자들과 맞서 싸우고 랭스 신학대학에서 교수 겸 교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이때 성직매매로 라임스의 주교가 됐던 마나세스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선 그는 사임을 요청하여 이를 이루어냈다.

대주교가 되어달라는 라임스 교구민의 바람을 뒤로한 채 은수자가 되어,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몇몇 동료와 함께 노동과 관상기도의 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고독과 철저한 가난을 살았다.

기도소와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그는 1082년 마침내 2명의 동료와 함께 랭스를 떠나 몰렘(Molesme)의 성 로베르투스(Robertus, 429)의 지도하에 은수자가 되었지만, 1084년에 그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주하여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그르노블의 주교인 샤토뇌프의 성 후고(Hugo)는 샤르트뢰즈(Chartreuse)라는 장소를 브루노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곳에 브루노와 동료들은 경당과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며 생활하였다. 이것이 곧 카르투지오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베끼는 작업을 하였으나, 그들의 규칙을 글로 쓰지는 않았다 

1090년 브루노는 옛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Urbanus II, 729)의 부름을 받고 로마(Roma)로 갔다. 교황의 명에 순명하여 은수처를 떠난 브루노는 이후 교황의 고문으로서 성직자들의 개혁 등 교회의 여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하였다. 얼마 후 브루노는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은수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에 정착한 브루노는 샤르트뢰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생활에 감명을 받은 시칠리아(Sicilia) 섬의 영주 로제(Roger) 백작으로부터 라 토레(La Torre)의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라 토레의 성 마리아'라는 은수처를 설립하고 운명할 때까지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시편과 성 바오로(Paulus)의 편지들에 대한 주석을 썼다 

공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카르투지오회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시성식을 거행하지 않았고, 다만 레오 10세 교황이 1514년 그를 구두로 시성하여 카르투지오회 내에서 브루노에 대한 공경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2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Gregorius XV)에 의해 축일이 106일로 정해졌으며, 16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0(Clemens X)는 모든 교회가 브루노의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