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레오 축일 11월10일 (교황 레오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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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레오 축일 11월10일 (교황 레오1세)

 

성인 레오 1세(대)

Saint Leo the Great
San Leone I, detto Magno Papa e dottore della Chiesa
 

성인 성인 레오 1세(대) (Leo I the Great)
축일 11월 10일 활동년도 +461년
신분 교황, 교회학자 지역 이탈리아 토스카나
같은 이름

레오는 사자라는 뜻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토스카나주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살았다고 한다.

431년 교황 첼레스티노 1세에 의해 부제가 된 레오는 곧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주교가 팔레스타인 교회의 치리권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에우베날 주교가 문제를 저지르자 이를 처벌하도록 교황에게 부탁해 달라고 청원할 정도로 로마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노가 언급했던 아프리카에 간 교황의 사절이거나 사절의 시종이 레오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요한 카시아노는 레오의 요청에 따라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한 신학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레오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 준 결정적인 사건은 서로마 황제가 직접 갈리아 최고 지도자인 애티우스와 알비누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라는 임무를 맡긴 것이었다 

440811일 교황 식스토 3세가 선종하자 레오가 만장일치로 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929일 레오가 교황좌에 착좌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중앙집권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황제와 교회간의 알력을 비롯하여 마니교도, 펠라기우스주의, 프리실리아누스주의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주의에 강력히 대처하는 등 수많은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였다. 448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대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 일파와 격돌하게 되었다.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Flavianus)가 내정한 원장이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던 에우티케스는 더욱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451년 레오 교황은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를 소집하여 천주강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아프리카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교황으로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권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성좌의 권위는 하느님과 성서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굳게 확립한 위대한 교황이다. 한마디로 그의 재임 기간은 교황권 확립의 시기였다. 그는 1754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성 대 레오와 아틸라의 만남.’ 그림에서 교황 레오 1세는 로마 밖에서 훈족의 왕 아틸라를 만나는 과정에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호위를 받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라파엘로가 그린 ‘성 대 레오와 아틸라의 만남.’ 그림에서 교황 레오 1세는 로마 밖에서 훈족의 왕 아틸라를 만나는 과정에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호위를 받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로마에서 태어나고 교회의 박사로 선포된 그는 우리 교회사에서 그레고리오 대교황(+604), 니콜라스 대교황(+867)과 더불어 3대 대교황으로 불린다. 그는 거룩하고 깊은 배움과 지식을 소유했었는데, 이른 나이에 교황의 개인비서 겸 조언자로 일하였다.

 
그는 40세에 서품되는데, 교황 식스투스 3세가 세상을 떠나자, 로마의 성직자들과 사람들의 비밀투표에 의하여 절대다수의 지지로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는 교황으로서 확실하게 교황직의 기반을 다지는데, 복음서의 근거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석인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의 수위권을 주셨고, 교황은 그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라는 것을 확고하게 발전시키고 가르친다.
 
그는 ‘교황직은 변함없이 계속되는 교회안의 수위권을 가지고 있고, 모든 주교들의 으뜸이며, 우리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회의 수장’이라는 것을 신념으로 가득찬 설교들과 편지들을 통하여 알리고 가르쳤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황직에 대한 그의 탁월한 업적들 중에서도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칼체돈 공의회(451)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두 본성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지니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두 본성은 하나다’는 가르침을 선언하고 확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에 에우디케스(Euthches)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만을 강조하는 이설(異說)을 주장하고 있었다.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등이 에우디케스의 이설에 동조하고 있었다.
 
레오 교황은 에우디케스를 ‘도둑들의 두목’으로 말하면서, 이내 칼체돈 공의회를 소집한다. 그리고 동방의 교부들이 600명 정도 모여들게 되었다. 교황은 사절을 보내어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플라비안(Flavian)에게 자신의 사도적 편지를 낭독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인성과 신성은 하나이고, 그분에게 그 두 본성은 온전하고 완전하게 존재한다’는 그의 사도적 편지를 듣고서 교부들은 말했다. “베드로께서 레오를 통하여 말하여 왔다. 레오는 신심과 진리 안에서 가르쳐 왔다 이것이 우리 교부들의 믿음이다.”
 
그는 452년에 아틸리아 훈족이 로마로 쳐들어와, 교황청이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침범자들에게 십자가를 들고 맞서서 그들을 설득하여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그때 자신의 등 뒤에서 위험에 처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모습을 보고서는, ‘하늘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하여 그 침범자들을 꼭 설득하고 물리쳐야 한다’고 마음을 정했다고 전승은 말한다.
 
그는 교회와 하느님의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수많은 그의 작품들로 남겼는데, 보존되어 전해는 그의 173통의 편지 중에서 143통은 그가 손으로 쓴 것이다. 그 외에도 약 80여 편의 설교가 전해지는데, 그 모두는 고상하고 풍요로운 가르침들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