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엘리사벳 축일 7월 4일 (화해의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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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엘리사벳 축일 7월 4일 (화해의 성녀)



성녀 엘리사벳

Sant' Elisabetta di Portogallo Regina

Sta. Elisabeth Portugaliae, Vid

Saint Elizabeth of Portugal

성인 성녀 엘리사벳 (Elizabeth)
축일 7월 4일 활동년도 1271-1336년
신분 여왕, 3회원 지역 포르투갈(Portugal)
같은 이름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이사벨, 이사벨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의 사촌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축일은 11월 5일,

헝가리의 왕비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축일은 11월 17일

7월4일이 축일인 엘리사벳은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이다


평화의 사도로 알려진 성녀 엘리사벳은 대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혹은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1271년 스페인의 아라곤 왕 베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왕녀 콘스탄시아 간에 출생하였다.

부친은 그녀에게, 황후로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헌신한 대고모가 되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을 본받으라고

그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당시 엘리사벳의 조부는 그의 장자인 베드로와 전쟁 중이었으나

엘리사벳으로 인하여 서로 화평을 맺게 되었다.

또한 조부는 어진 왕녀의 교육을 자진 맡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평화 조정자로서 그녀의 일생이 예고되었다고 하겠다.

엘리사벳은 불과 12살에 포르투갈 왕 데니스와 결혼하였는데,

오랫 동안 자녀를 얻지 못하다가 후에 두 남매를 얻었다.

남편은 왕으로서는 능력있고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성실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왕의 사생아들을 친자식처럼 기르고 언제나 친절과

사랑으로 남편을 대하며 동양의 현모양처처럼 끝까지 참고 기다렸다.

아침엔 일찍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 참례를 한 후

성서를 읽고 맡은 바 집안 일을 하였다.

그 외에도 가난한 자와 환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궁중의 호화찬란한 생활을 피하고

매일 빵 세 조각과 물로써 연명할 만큼 극기의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감탄할 만한 극기와 애덕의 생활이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였던지 그녀를 통하여 가끔 기적이 일어났다.

즉 눈먼 아이의 눈에 손을 대자 눈이 밝아졌는가 하면 환자에게 십자성호를 그었을 때 즉시 완쾌되는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왕이 사생아들을 더 좋아한다고 반란을 일으킨 왕자 알퐁소와 왕과의 부자간 싸움을

전투부대 사이를 가로질러 두 차례나 화해시켰으나 왕후가 아들을 사촉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모함에 따라 잠시 동안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복수해야 된다는 신하들을 설득시켜 왕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였다.

엘리사벳은 아라곤 왕인 페르디난도와 왕위를 주장하는 그의 사촌 야고보와의 싸움에 있어서도 중재인의 역할을 하였다. 양군이 대진하여 막 전쟁이 벌어지려 할 때에 왕비가 홀로 뛰어나가 양편을 조정시키고 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였다.

1325년 장부인 데니스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왕후의 극진한 간호를 받다가 선종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알퐁소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란치스꼬 제3회의 옷을 입고 그녀가 세운 코임브라에 있는 글라라회 근처에 방을 얻어 수도 생활을 시작, 그녀의 삶은 수도자의 모범이 되었다.

1336년 그녀의 아들 알퐁소 왕과 사위인 케스틸 왕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건강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무더위를 무릅쓰고 에스트레모스로 달려가 양자간의 화해를 이루었으나 과로와 열병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병고를 잘 참았고 조금도 그 아픔을 내색하질 않았다. 어느 날 머리맡에서 간호하던 자부를 보고 “미안하지만 거기 오시는 부인에게 자리를 좀 양보해 줄 수 없겠니?” 하고 말하였다. 자부는 “아무도 안 계신데 누구신데요” 하고 물으니 “바로 거기 계시지 않니, 흰 옷을 입으신 분이…”라고 대답하였다. 바로 그분이 그녀를 영접하러 오신 성모님이셨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성총의 모친, 자애하신 모친이신 성 마리아여! 원수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임종 때에 나를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1336년 7월 4일 65세로 에스트레모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를 막기 위해 바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유해는 코임브라에 있는 글라라 수녀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1625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녀를 시성하고 그녀를 위해 성무일도와 찬미가도 지었다. 축일은 처음엔 7월 8일이었으나 그녀가 저 세상에 태어난 날인 7월 4일로 옮겨졌다.

성녀의 탄생은 평화를 가져왔고 성녀의 사업도 평화였으며 또 평화를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 부부간의 평화, 부자간의 평화, 친척간의 평화, 국가간의 평화를 위한 그녀의 기구와 희생과 노력은 많은 불행과 재난을 방지하였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리니”(마태 5,9). 분열된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놀라운 은총을 받은 성녀 엘리사벳의 전구로 우리도 남북이 분열되고 동서가 불목하는 이 땅에 화해와 평화를 심는 역군이 될 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과 기도와 희생을 바쳐야겠다.

[경향잡지, 1988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