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성인 요한바오로 2세 축일 10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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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성인 요한바오로 2세 축일 10월22일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John Paul II)
축일 10월 22일 활동년도 1920-2005년
신분 교황 지역
같은 이름

바울로,바울루스,빠울로,빠울루스,얀,요안네스,요한네스,이반,장,쟝,조반니,조안네스,조한네스,존,죤,지오반니,파울로,파울루스,폴,후안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Wadowice)에서 탄생한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sep Wojtyla)는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 카롤 보이티와와 어머니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의 둘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1929년에 세상을 떠났고, 의사였던 그의 형 에드문트는 1932년에 사망하였다. 폴란드 육군 하사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1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9살 때 첫 영성체를 하고 18살 때 견진성사를 받았다. 바도비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크라쿠프(Krakow)의 야기엘론스키(Jagiellonski)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세력이 대학을 폐쇄하자 젊은 카롤은 독일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석회암 채석장과 솔웨이(Solway) 화학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 성소를 발견한 카롤은 1942년부터 아담 사피에하(Adam Sapieha) 대주교가 운영하는 크라쿠프의 지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카롤은 지하 극단인 '랩소디 극장'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종전 이후 카롤은 다시 열린 크라쿠프 신학교와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신학부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946년 11월 1일 크라쿠프 교구장 아담 사피에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사피에하 추기경은 그를 로마로 보냈고 그는 1948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 드러난 신앙을 주제로 쓴 논문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에 그는 방학이 되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 있는 폴란드 이민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48년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크라쿠프 근처의 니에고비치(Niegowice) 성당과 성 플로리아노(St. Florian) 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사목하였다. 1951년까지 그는 대학교 교목으로 있으면서 철학과 신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953년 그는 루뱅 대학교에서 "막스 셸러(Max Scheler)의 윤리 체계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윤리학 성립 가능성에 관한 성찰"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 후 그는 크라쿠프 신학교에서 사회윤리학을 강의하고, 1956년에 루블린(Lublin) 가톨릭 대학교의 윤리학 교수가 되었다.

1958년 7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옴비(Ombi)의 명의주교 겸 크라쿠프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1958년 9월 28일 크라쿠프의 파펠 대성당에서 유게니우스 바지아크(Eu geniusz Baziak) 대주교에게서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38세로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주교가 되었다. 바오로 6세(Paulus VI) 교황은 1963년 12월 30일 그를 크라쿠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고 1967년 6월 26일에는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이티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사목헌장의 마련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교황직에 오르기 전까지 보이티와는 주교대의원회의의 다섯 번 회의 중 네 번을 참석하였다.

그는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Hadrianus VI) 이래 456년 만의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 되었다. 1978년 10월 22일에 교황으로 즉위하여 보편 교회의 목자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146 차례의 사목방문을 하고 로마 교구장으로서 로마의 332개 본당 중 317개의 본당을 방문하였다. 그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모든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104 차례의 해외 순방을 하였다.

그의 주요 문헌으로는 14개의 회칙, 15개의 교황 권고, 11개의 교황령과 45개의 교황 교서가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책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1994년 10월), “은총과 신비 :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이하여”(Gift and Mystery : on the Fiftieth Anniversary of My Priesthood, 1996년 11월), “로마 삼부작 - 명상”(Roman Triptych - Meditations, 2003년 3월), “일어나 가자”(Rise, Let Us Be On Our Way, 2004년 5월), “기억과 신원”(Memory and Identity, 2005년 2월)이 포함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47차례의 시복식을 주재하여 1,338명을 시복하고 51차례의 시성식을 주재하여 총 482명을 시성하였다. 또한 9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231명(1명의 비밀 추기경 제외)의 추기경을 임명하고 6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1978년부터 주교대의원회의를 15회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정기총회 6회(1980, 1983, 1987, 1990, 1994, 2001), 임시총회 1회(1985), 특별총회 8회(1980, 1991, 1994, 1995, 1997, 1998[2회], 1999)가 있다.

1981년 5월 1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성모님의 자애로운 손길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오랜 회복기를 거친 다음 그는 그 괴한을 용서하였다. 새 삶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는 영웅적인 아량을 발휘하며 사목 활동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는 목자의 배려로 많은 교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라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를 위한 교회법전도 공표하였다. 그는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는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구원의 해, 마리아의 해, 성체성사의 해, 2000년 대희년 등을 제정하였다. 그는 또한 세계청년대회를 제정하여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난 교황은 없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에 있는 일반 알현(1,160회 이상) 때 1천 7백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교황을 만났다. 여기에 특별 알현이나 예식(2000년 대희년에만 800만 명), 이탈리아를 포함 전 세계의 사도 방문에서 만난 수백만의 신자들이 추가된다. 38회의 공식 방문을 통하여 많은 정부 관리도 교황을 알현하였다. 그리고 738차례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국가 원수들을, 246회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총리들을 만났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 교황궁에서 2000년에 그가 제정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 사백주일) 전야인 2005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9시 37분에 선종하였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선종한 그는 4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장례미사 뒤에 바티칸 대성전의 지하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2011년 5월 1일, 생전에 그가 제정하고 그 전야에 선종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가톨릭 교회 역사상 최단 기간에 복자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교황 즉위 기념일인 10월 22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요한 23세(Joannes XXIII) 교황과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과 시성은 한국 가톨릭교회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1984년 5월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중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미사와 한국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거행했다. 1989년 10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맞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광장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했고, 5.18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은 한국 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