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가타리나
Saint Catherine of Sienna
Saint Catherine of Siena, Doctor
Santa Caterina da Siena Vergine e dottore della Chiesa, patrona d’Italia
간호사들의 수호성인
성인 | 성녀 가타리나 (Catherine) | ||
축일 | 4월 29일 | 활동년도 | 1347-1380년 |
신분 | 수녀,교회학자,신비가 | 지역 | 시에나(Siena) |
같은 이름 |
까따리나,카타리나,캐서린 |
6세때 신비체험 후 일생을 주님께 봉헌
18세에 성 도미니코 제3회 입회 병자들 돌봐
간호사들의 수호성인 … 1970년‘교회학자’선포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S. CATHARINA DE SIENA)의
생애와 사상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그녀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1970년 10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로 부터 교회 박사 칭호를 받았다.
여성으로서 교회 박사가 된 이는 교회 역사 안에서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모든 생활 체험에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 하느님의 신비를 깊게 파고든 그녀에게는 너무나 적절한 일이다.
카타리나는 당시의 교황과 귀족들, 수도자, 상인들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썼다.
또, 교황과 피렌체 시민들 사이의 논쟁을 중재했을 때 암살 위기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도 받지 못했던 33살의 그녀에게 신비가, 중재자, 신학자, 설교자, 간호사, 교회 박사 등의
모든 호칭이 거룩한 월계관으로 주어진 것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헤지오그라피라고 불리는 일종의 성인전으로서,
모범이 되거나 영감을 주는 인물에 대한 본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공경하기 위한 전기다.
이들은 많이 윤색되긴 했지만, 정열적이고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여 다소 어색하긴 해도 그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카타리나에 대하여 전해진 그리고 기록된 전승들은,
모두 함께 영향력 있는 14세기 여인의 모습을 20세기의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1. 연혁
1347년 3월 25일 염색업자 베닌까사 야고보와 아내 라빠 사이에 23번째 쌍둥이 자매로 태어남.
1348년 1세 25번째 동생 난나 태어남. 시에나에 처음으로 흑사병 유행.
1353년 6세 첫 환시 경험.
1354년 7세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정결서원). 10살때까지 고행, 사색, 관상을 통한 영적생활.
1362년 15-16세 언니 보나벤투라 사망. 첫 고해신부이며 지도자인 폰테의 토마스 O. P.의 충고에 따라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결혼 계획을 거부.
참회의 수녀회 입회. 서원. 몬테 풀치아노의 성녀 이녜스와의 기적. 탈혼.
1365년 18세 만텔라테들의 도미니꼬회 수도복을 받고 3년간 고독의 시기 시작. 그동안에 읽는 법을 배움.
1368년 3년 동안의 유혹 끝남. 예수와 약혼.
* 8월 12일 아버지 야고보 사망. 옆구리 고통 받음.
* 혁명으로 가족들 시에나에서 추방됨. 폰테의 토마스 수사. 가파리니 신부(신학과 성서 설명). 두번째 고백신부가 된 도미니치 신부를 알게 됨.
카푸아의 라이문도 (두번째 고해신부. 후에 도미니꼬 수도회 총장.).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구장. 아우구스티노 수사들. 참회의 수녀회 수녀들과 교류 시작.
* 정치가. 예술가. 일반 또는 상류층의 사람들과의 사제 관계 형성.
1370년? 23세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지키기 위해 미사, 기도, 희생을 함. 영성체 후에 탈혼. 예수의 물과 피를 마심.
1372년 25세 염문에 대한 환청.
1373년 사순절부터 예수 승천 때까지 55일간 절식.
1374년 27세 때 처음으로 피렌체로 여행. 카푸아의 라이문도 O.P.가 그녀의 고해신부와 지도자가 됨. 시에나에서 흑사병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봉사. 페스트 퍼짐. 조카 8명 죽음.
1374-1376년 권력가. 상류층 인사들, 학자들에게 십자군 전쟁 추진서한 보냄.
1375년 피사 성당 미사 중 공중부양과 오상의 기적을 받음. 피사로 여행하여, 피사와 루까 시가 교황을 반대한 동맹에 가담하지 않도록 설득. 그해의 대부분을 피사에서 보내며,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설교에 새 힘을 얻음.
1375-1377년 고행 관상 생활 시작.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적
1376년 3월 26일 아비뇽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피렌체 평화협정 실패. 중재자로 나섬.
* 6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알현. 설득.
* 9월 13일 교황, 로마 귀환 중 제노바에서 카타리나 접견.
1377년 1월 16일 교황 로마 환궁. 벨카로 성을 입수하여 수녀원 세움.
* 9월 라이문도 신부 미네르바 수도원 원장이 됨.
* 그녀의 편지 272통은 「대화」의 원본이 됨.
* 12월? 도시간 평화정착 시도.
1378년 3월 27-28 교황 서거.
* 6월 18일 구에프 일당에게 암살 위기.
* 7월 8일 바르톨로메오(우르바노 6세) 교황 선출
* 9월 20일 로베르또(클레멘스 7세) 교황 선출. 성 빈첸시오 페레르가 지지.
* 10월 ? 「대화」 완성.
1380년 2월 탈진.
* 3월 26일 병자성사(바로톨똘로메오 도미니치 신부).
* 4월 29일 선종.
1461년 6월 28일 시성(교황 비오 2세).
1866년 4월 13일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 (교황 비오 9세).
1940년 5월 15일 이탈리아 첫 수호자 공포 (교황 비오 12세).
1943년 9월 15일 간호사의 수호자.
1970년 4월 4일 교회학자.
2. 시대적 배경
카타리나가 살았던 당시, 1347년부터 1380년 사이에 교회사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황제를 겸하고 있던 교황 아래 통일되어 있던 유럽 국가들은 주권을 요구하며 투쟁하였고, 독립국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 사회, 그녀가 몸담았던 도미니꼬 수도회 모두가 혼돈의 상태이자 신비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고, 터키인들에 대한 십자군과 피렌체와 교황의 알력, 그리고 서방대분열로 인한 그리스도교의 불일치가 있었다. 1348년 흑사병의 대유행 이후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단지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성직을 맡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교회는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 양편에 모두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교황의 시도에 대응하여 필립은 프랑스 주교 관구들이 로마 교황청의 경비 분담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했고, 보니파시오는 필립을 파문했다. 1305년에 교황 글레멘스 5세로 선출된 베르트랑 드 고트(Bertrand de Got)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그 이후 70년간 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이 따를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 놓았다.
카타리나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은 특히 심하게 이러한 외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해 있었던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의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계속되는 불화와 유혈혁명을 통하여 피렌체와 시에나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를 얻었으며, 13세기 끝무렵에는 아홉 명의 대의원들 그룹이 선출하여 시에나를 통치했다. 카타리나의 아버지 야고보 베닌까사는 이러한 포폴라니(통치자가 되도록 피선거권이 있는 사람)에 속한 사람이었다. .
3. 사상(신비주의)
짧으면서도 열성적인 활동으로 일관된 가타리나의 삶을 볼 때, 신비적 체험이 없었다면 그같은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온은, 카타리나 같은 성인의 생애에서 신비를 배제하는 것은 인격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나 같다고 말했다. 라이문도도, 그녀와 가까이서 알고 지내다보니 그녀가 영혼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곧바로 더 없이 자연스럽게 천상의 일들로 마음을 들어올리는 흐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녀가 관상 중에 체험한 것은 곧 그녀를 행동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었으며 활동하면서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 일체는 바로 기도 속에 현존하고 있었다. 그녀의 관상은 활동생활 한 가운데 현존하고 있었고, 그녀가 기도하고 심지어는 탈혼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던 사실들이 많은 편지 속에 나타나 있다. 그녀의 글들을 기도와 활동 사목의 상호작용이 더없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에 필요적절한 것이 되고 있다. 진리와 사랑 - 카타리나에게 하느님은 온유하신 최초의 진리요, 사람에 미치신 자의 그 자체이셨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지식과 사랑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기리고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더 없이 간절한 욕구로 들뜬 채로 일어선다. 영혼은 일정 시간 덕을 실천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쏟아져 내려오는 하느님의 선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 자기 인식의 독방에 기거하는 데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지식에 뒤이어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은 사랑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로 자신을 감싸는 것이다. 「대화」첫 단락
카타리나의 사랑은 언제나 또렷한 의식 속에서 진리의 빛 속을 걸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거침없이 ‘사회적인 신비가’로 이상화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느님 안에서 체험한 ‘진리’를 절대로 수정하려 들지 않던 가타리나의 철저한 타협 거부와, 눈으로 목격한 잘못들을 모조리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그녀를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완벽한 인간적 의미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었다. 가타리나는 진실로 신비적인 활동가였다. 가난과 질병,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불의의 고통은 그녀에게는 단순한 악도, 체계적인 악도 아니었다. 그것이 악이라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 과정에서 메말라지면서 역으로 자신의 육체까지도 쇠약하게 만들어 버린 바로 그 정서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초월하여 훨씬 더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런 형태의 활약은 비록 기쁜 것은 못 되었지만 그녀의 신비적 체험이 요구했던 것이었고, 그녀의 글들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활약인 것이다.
4. 카타리나의 신학
그녀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신학이라 부를만한 글을 써본 적도 없었다. 그녀의 글은 체계도 없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답답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녀의 가르침은 토마스 계열에 속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확실히 아우구스티노 계열에 속한다. 그녀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은 우베르티노 다 카살레다(그리온)이며, 도미니코회 수도자 자코포 다 보라지네와 카발카의 저서들에서 근본적인 영향을 받았다. 카타리나는 이 모두를 자기 안에 흡수하고 통합시켜서 자신의 전체적인 지식을 형성하였다. 신학적으로 보면 새롭거나 창의적인 것은 없다. 가톨릭 가르침 속에 온전히 들어가 있으며,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믿어지는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들까지도 틀림없는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카타리나의 독창적인 부분은 이같은 전승을 신선하고 생동감있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카타리나가 쓰고 구술한 글들은 모두가 시에나의 방언인 넬 수오 볼가레였다. 파산반티와 카발카가 본고장 말을 사용하여 종교적인 문제들을 기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항상 가능한 모든 부류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했으며 질서정연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주제를 아주 밀도있게 전개했으며, 은유가 산재하고, 늘 새로운 연결관게가 하나의 층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카타리나의 초기 편지들 일부에서 어느 정도 부차적인 성격을 지니는 까닭에 「대화」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비적 체험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다.
5. 「대화」에 대해서
「대화」는 그녀가 제자들에게 베푼 모든 가르침을 담은 최고의 저서이자 유산인 셈이다. 카타리나는 이를 그저 ‘나의 책’이라고 불렀으며, 라이문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울러 부탁드리거니와 당신과, 바르톨로메오 (데 도미니치) 형제, 토마스 (델라 폰테) 형제, 그리고 대작곡가 (조반니 탄투치)는 이 책과 그 밖에 눈에 띄는 내 모든 글들을 간수하십시오. 토마소 (피에트라) 선생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데다 이용하십시오. 이들은 나의 심신에 위안을 주었던 것들입니다.”
전승이 영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들은, 카타리나가 「대화」 전체를 닷새 동안 탈혼 중에 구술하였다는 비교적 공통된 믿음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와 동시대인들 다수가 이 작품에 붙인 지극히 복합적인 참고사항들로 보면 여기에 소요된 시간은 훨씬 더 길어서 1년 가까이 되지 않았는가 싶다. 이 책은 그녀가 두 번째로 평화를 주선하는 사명을 띠고 피렌체로 출발한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던 것이 분명하다. 피렌체에서 몇 달 보내는 그 정신없는 동안에도 카타리나는 틈틈이 원고를 붙잡고 시간을 보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책을 보면 카타리나는 교회 분열이 극도로 심화되지 않고 그 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교회 내부의 부패와 개혁의 필요성은 많이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분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카파리니는 그녀가 1378년 11월에 로마로 불려가기 이전에 이 책을 끝마쳤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서 구술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대화」의 문체는 ‘탈혼 상태에서의 구술’과는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늘이거나 줄이느라 굉장히 고심한 흔적까지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스테파노 마코니가 전한 카파리니의 기록 또한 그녀가 “본향 사투리로 손수 작성한 책 가운데서 여러 페이지를” 친히 쓰고 있는 광경을 직접 똑똑히 목격했었노라고 쓰고 있다. 아무튼 편지들과 「대화」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특정한 주제와 심상들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반드시 발견하기 마련이다.
6.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기도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참 하느님이신 당신께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저를 모든 악한 생각에서 보호하시며,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시고 불타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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