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세례명] 베로니카 지울리아니 축일 7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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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성당 세례명] 베로니카 지울리아니 축일 7월9일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

St. Veronica Giuliani, OFM Cap. Abbess (RM)

Santa Veronica Giuliani Vergine

Sta. Vernoica Julianis, V
 

성인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 (Veronica Giuliani)
축일 7월 9일 활동년도 1660년 12월 27일 ~ 1727년 7월9일
신분 수녀원장,신비가 지역 이탈리아 우르비노 출생, 이탈리아 치타 디 카스텔로 사망
같은 이름

베로니까, 베로니카, 율리아니

 

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의 메르카텔로(Mercatello) 출신인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는

우르술라(Ursul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때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그래서 결혼하라는 부친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677년에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하여 1697년에 오상을 받았다.

치타디카스텔로의 주교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녀의 오상은 진실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34년 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맡았으며,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성녀 베로니카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은 18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1804년 복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생애는 바로크 시대의 신비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의 영적 생활은 사랑의 관상과,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신비와 보속을 위한

고통과 희생을 위한 어마어마한 갈망의 강렬한 체험으로 이루어진 명확한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녀의 삶은 특별한 현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프란치스코처럼 베로니카도 오랫동안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고통의 신비에 대한 그녀의 접근법은 그녀의 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그리스도의 오상과의 관련성은 중세 시대의 여성들에게서 나타는 단지 신심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실제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가지의 삶.-강렬한 내적 삶과 수녀원 공동체에서의 외적 삶- 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는 이 내적, 외적 여정을 통합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을 보여준다.

이 여인은 12-13세기의 비옥한 수도적 토양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 신비가의 저서들과 달리

그녀의 저서들에 있어선 다른 접근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선택을 바라보고 새로운 질문을 던질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항상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 시대의 심리학적 연구의 발달을 고려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베로니카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그녀의 성덕 때문에 시복 소송이 제기되었고

1839년 5월 26일, 그녀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래서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자신의 전 생애를 하느님의 내적 선물로 받아들일 줄 알았던 여성으로서

클라라 회원들의 오랜 신비주의적 전통선상에 서 있다.

그녀는 이것을 "지상에서의 낙원(천국)"(D. I,184,210,572; IV,594; VI,177)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기 6개월 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주님,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이제껏 죄를 지은 것에 용서를 청합니다.
더 이상 저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삶과 피를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바칩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뜻만을 따르며 다른 의지는 없습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뜻이 저를 만들었고
저는 그 안에서 살고 죽을 것입니다.
죽음 뒤에, 영원토록 저는 당신의 뜻대로 할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D. IV,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