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복자 비오9세 축일 2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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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복자 비오9세 축일 2월7일

 

복자 비오 9세


 

성인 복자 비오 9세 (Pius IX)
축일 2월 7일 활동년도 1792-1878년
신분 교황 지역
같은 이름

비우스,피오,피우스

 

1792년 5월 13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근처 세니갈리아(Senigall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는 1803년 볼테라(Volterra)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간질병을 얻어 180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때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포기하고 로마의 타타 조반니(Tata Giovanni) 고아원에서 사제로서의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칠레와 페루의 교황대사인 무치(G. Muzi) 주교를 보좌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해와 사도적인 열성을 얻고 돌아온 그는, 1825년부터 1827년까지 로마의 산 미셸(San Michele) 구호원의 관리 책임을 맡았으며, 1827년에는 스폴레토(Spoleto)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반성직주의와 교황의 세속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몰라(Imola) 교구의 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1833년에 라벤나(Ravenna)의 대주교 팔코니에리(Falconieri)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과 1845년에 작성하여 로마로 보낸 “교황령 행정에 관한 고찰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자유사상과 행동을 배격하면서 바른 그리스도교적인 환경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1840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조반니 마리아는 1846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 1831-1846년)가 사망했을 때는 후보자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나, 그레고리우스 16세의 체제를 계승하려는 보수파들의 대표자인 람브루스키니(L. Lambruschini)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들에 의해 교황 후보자로 강력히 부상되었다. 그리고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이틀 만인 1846년 6월 16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이몰라의 주교였던 비오 7세 교황(1800-1823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비오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그는 1846년 회칙 “퀴 플루리부스”(Qui Pluribus)를 통해 사제 지원자들의 엄격한 선발과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같은 해에 수도회성을 설립하여 수도회의 개혁을 촉진하였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여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다가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다시 돌아왔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대칙서를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함으로써 마리아 신심을 증진시키고 신학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하였고,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1859년 로마냐(Romagna) 그리고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케(Marche)를 잃었고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고 이듬해 일방적으로 ‘보장법’을 발표함으로써 교황의 모든 세속주권을 빼앗겼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와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그는 이탈리아 정부와 더 멀어졌고, 공의회의 결과로 발생한 이교인 구가톨릭교(Altcatholizismus)와 서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반성직주의 운동을 목격하였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 비오 9세는 재위중인 1857년 조선 순교자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1866년 초 조선에 병인박해가 발생했을 때 그 해 12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교우들을 위로하고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이지도 외교적이지도 않았으며 본질적으로 사목자였다. 하지만 그가 재임할 때의 역사적인 상황,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국가 통일 운동)의 시기는 그를 정치와 연루시켰다. 그는 정치적으로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근대 세계와 문명에 대한 이해 또한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성과 교회의 엄격한 수도회의 부활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반얀센주의 신심을 일깨우고 재속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세속화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교회 특히 교황의 자주와 독립을 확립하였다. 1878년 2월 7일 사망한 교황 비오 9세의 유해는 1881년 7월 13일 베드로 대성당에서 산 로렌조 성당(San Lorenzo fuori le Mura)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부터 그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시성을 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2000년 9월 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복식에 참여한 약 10만 명의 신자들에게 강론을 통해 비오 9세 교황에 대해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으며 언제나 하느님과 영적인 가치들을 그 무엇보다 우위에 두었다”면서 “그분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증오와 비방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교황 비오 9세는 1700년 이후 최연소 교황이었으며 베드로 사도 이후 가장 오랜 기간(32년) 교황직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