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 히야친토 축일 8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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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인 세례명 축일

[천주교 세례명] 히야친토 축일 8월17일

 

성인 히야친토

San Giacinto (Jacko) Odrovaz

St. Hyacinthus, C

St. Hyacinth of Cracow
 

성인 성인 히야친토 (Hyacinth)
축일 8월 17일 활동년도 1185-1257년
신분 신부, 선교사 지역 크라쿠프(Krakow)
같은 이름

히야친또, 히야친뚜스, 히야친투스, 히야친트, 히야킨또, 히야킨뚜스, 히야킨토, 히야킨투스

 

90년대 민주화가 되기 전 철의 장막속에 들어있었던 유일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는 10세기 말경에 비로소 복음의 씨를 받은 나라이다.

물론 처음부터 전국민이 복음을 잘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을 계몽하고 신앙의 뿌리를 깊이 박아 준 이는 성 아달베르토와 히야친토같은 분들인데, 그들은 동분서주하며 대 활약을 했던 것이다.



히야친토는 1185(1183)년에 태어났으며 서 폴란드의 귀족 오도로본스가의 출신으로 초등 교육을 크라코우와 프라하에서 받고,

그 후 이탈리아에 유학해 신학과 교회법을 연구한 후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 후 크라코우에 돌아와 카돌베크 주교의 비서로서 활약했다.

칼돌베크 주교가 서거하자 그 훙미 주교로서 히야친토의 백부인 콘스키가 임명되었다.

그가 임명되자, 1218년 교황께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는데, 히아친토와 체슬라오라는 두 조카도 동반했다.

그때 로마에는 스페인의 성 도미니코가 신설 수도회의 인가를 얻기 위해 와 있을 때였다.

콘스키 주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동해 폴란드에도 그들의 수사를 파견해 줄 것을 청했다.

그때 동반한 히야친토와 체슬라오도 이에 깊이 감명되어 즉시 입회해 성 도미니코에게 잠시 동안 수련을 받은 후

성녀 사비나 성당에서 착복식을 올렸다.

이로서 성 도미니코회의 폴란드에서의 큰 활로는 열린 것이다.

곧 귀국한 히야친토는 수도 크라코우에 도미니코회의 수도원을 세워 이를 하느님이신 성삼위께 봉헌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설교를 했던 바, 곳곳에서 큰 성과를 거두게되었다. 그는 각지에서 대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열렬한 기도와 고행의 생활은 기적을 행하게까지 되었으므로 사람들의 그에게 대한 신뢰는 지극해서 제각기 앞을 다투어 모여와

그의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히야친토가 프러시아 지방에서 전교를 하기 위해 친구와 더불어 단치히시에 가려고 반달룸 강변에 도착한 때였다.

때마침 장마로 인해 잔뜩 불은 강물은 무섭게 구비지며 흐르고 다리도 배도 없는 지라 더욱 막연한 일이었다.

그때 히야친토는 잠시 땅에 무릎을 꿇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를 하고 일어나

강물 위에 십자를 긋고 나서 동료들과 같이 수도복에 붙은 망토를 깔고 그 위에 서서 건너게 되었는데

마치 배를 탄 것처럼 조금도 빠지지 않고 잘 건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의 시성 조사록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기적이다.

 

그는 중요한 도시마다 수도원을 세우고 일대 사도적 활약을 개시했다.

그러던 중 달단족의 내습으로 인해 많은 수도원이 파괴되었으나 그는 이런 불의의 재화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즉시 복구에 착수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의로 인해 어떤 때는 철야 기도를 했으며,

침대는 땅바닥이요 베개는 돌로써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도직을 완수 하기 30년간,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1257년 8월에는 중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고, 그

가 항상 사랑하던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에 병자 성사를 받고

세상에서 닦은 그 공로의 보수를 받기 위해 천국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는 폴란드의 사도로 공경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