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여행] 담양 소쇄원 (조선시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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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여행/전라

[담양여행] 담양 소쇄원 (조선시대 정원)

 

 

소쇄원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 061-382-1071

http://www.soswaewon.co.kr/

무료주차

입장료 : 어른 2,0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

 

 

죽녹원을 나와 소쇄원으로 향한다.

 

 "담양을 가면 소쇄원은 꼭 들려봐야지.." 라는 지인의 말..

도대체 소쇄원은 어떤곳일까..

 

'조선 선비문화의 산실 소쇄원은 시각적인 차원을 넘어선 청각적인 정원이자

궁극적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인 정원이다.'

소쇄원을 설명하는 이 글조차 나의 궁금증을 더 자극하게 만든다. 

 

 

소쇄원 주차장은

소쇄원 입구 길 건너편에 있었다.  무료다.

 

 

 

담양 소쇄원 (園)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17세인 양산보 (甫, 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 (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 기도 하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소쇄원 매표소..

어른 2천원

우리는 또 내밀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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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원 할인받았다 ㅋ

 

 

소쇄원 공간은 판화로 1755년에 만들어진 소쇄원도와 1548년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 48영에 의해서 잘 알 수 있다.

현재는 1,400여 평의 담장 안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 범위를 포괄적으로 보면

內園과 담장 밖 공간의 外苑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김인후가 쓴 소쇄원 48영을 중심으로 그 시제에 나타난 내용에서 소쇄원의 구성요소를 살펴볼수 있다.

 

[소쇄원 내원] <홈페이지 발췌>

 

 

 

 

역시나 담양답게 소쇄원으로 들어가는길

양쪽으로 대숲이 울창하다.

 

 

 

소쇄원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풍광을 관상하며 여유를 즐긴 장소요, 이상을 토로하던 문화 담론의 산실이었다.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사유와 만남의 지평을 넓혔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는 수양과 학문뿐 아니라 풍류와 사귐을 통한 선비문화의 형성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를 위한 장소인 정자나 별서를 경영하는 일은 곧 그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산물이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서 무등산 원효계곡에는 소쇄원을 비롯하여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 등의 정자원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소쇄원은 주거기능을 갖춘 별서로서 한국 최고의 별서원림이라고 한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대봉대(臺)

축대위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 정자의 모습이다.

이곳은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 칭하니 귀한 손님을 오기를 기대하는 정겨움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옛. 대봉대모습>

 

원래 이곳이 이곳 소쇄원에서 가장 오래된 터였지만

건물은 근래에 옛모습을 본떠 새롭게 지은것이라고 한다.

 

 

오곡문 五曲門

오곡문은 담밑의 구멍으로 흐르는 계곡물 ‘원규투류垣竅透流’바로 옆쪽에 있던 협문夾門 형식으로서 담밖의 영역(외원)과 담안의 영역(내원)을 이어주는문이었다.

 

 

현재의 문이 있었던 옛자리에 구멍만 뚫려 있는 정도이며, 이를 대신하여 담장에 글씨로쓰여있다.

오곡문 아래 수구()를 통해 들어온 계곡물은 소쇄원의 영역을 둘로 나누어 놓으며,

풍부하지는 않지만 면면히 이어져 소쇄원의 생기를 돋우는 생명수가 되어

뚫린 담장 밑으로 흘러 들어온 물길이 다섯 번 굽이쳐 돌면서 흘러내려 간다.

 

 

소쇄원의 담장

담장은  낮아 방어를 위한 폐쇄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골바람을 막아주고

경역의 한계를 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매대 뒤쪽에 있는 담장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瀟灑處士 公之廬’(소쇄처사양공지려)라는 글이 보인다. 

 

 ‘려廬’가 의미하는 오두막이 따로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 ‘려’라 함은 자기집을 낮추어부르는말로 겸손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담장의 바로 뒷부분에 조그마한 단이 있는데,이 단은 처사공의 제단이라고 전한다.

입구에서부터 애양단까지의 직선 담장에는 김인후의 48영이 새겨진 목판이 박혀 있었으나

담장이 유실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소쇄원에는 여러 건물이 있는데 입구에서 봤던 대봉대

그리고

 

 

광풍각

 

광풍각 구역은 제월당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의 팔작지붕 한식기와 건물이다.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흉회쇄락여광풍제월 ()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어찌보면 처사로서 양산보의 삶이 마음에 맑고 깨끗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마루에 앉아 쉰다.

 

그리고 제월당으로 향한다.

 

 

 

수학여행으로 몰려온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얽혀서 시끌시끌..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머물고 싶었는데..

가이드 할아버지 목소리와 떠드는 소리

그리고 조용하라는 선생님의 야단치는 소리...ㅠ

 

 

제월당

소쇄원의 주 건물 제월당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霽月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지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는 소쇄원

내겐 조금 아쉬움으로 기억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