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교구 성지순례] 새남터 기념성당 미사시간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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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가톨릭 성지

[천주교 서울교구 성지순례] 새남터 기념성당 미사시간 (순교성지)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http://www.saenamteo.or.kr

전화번호 02-716-1791

 새남터 기념성당 미사시간 안내

 순례미사

 매일 15:00 

 주일

 토요일 18:00

 일요일 06:00 / 09:30 / 11:00 / 15:00 / 18:00

 평일

 06:00 월, 화, 수요일

 10:00 목, 금, 토요일

 

 

 

용산역 근처쯤 왔을때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이 새남터 순교성지 성당이다. 

 

 

 

저기 현수막에 적힌 그대로

이곳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곳이다.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목을 떨 군곳 새남터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조선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이자 중죄인의 처형장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2년(1456년)에 사육신이 충절의 피를 흘린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유박해(1801년)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1866년까지

바로 이곳에서 외국인사제까지 모두 11명의 거룩한 성직자 순교의 피를 흘린 장소이다.

 

 

 

이곳 새남터에서 가장 먼저 순교의 피를 흘리신 분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신부 이다.

그는 조선의 교우를 위해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들어오게 된다.

주 신부는 쫓기는 생활중에서도 6천여명의 신자를 탄생시키게 된다. 

하지만 결국은 그를 숨겼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목숨을 잃게 되자 고통받는 신자들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 가려고 했으나,

다시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이곳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31년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게 된다.

그렇게 조선교회의 신자수는 9천명에 다달았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이 세명의 소년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지게 된것이다.

최초의 신부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하지만, 1846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마저도 바로 이곳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게 된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매장되었는데 다시 40일후에 미리내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1901년 용산 예수 성심 심신하교로 옮겨졌다가 두개골을 1951년 혜황동 가톨릭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한다.

 

26살...

난 그때 뭐하고 있었더라??

 

.

 

성모상 또한 이곳 한옥과 어울리는 모습이셨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성모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앞에 ......전대사 수여 성당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다.

미사는 15:00

사실 점심을 늦게 먹었던터라 살짝 졸았다. 참... 한심한지고..

 

 

 

 

 

미사후 마당으로 나와서 이리저리 살피고있었는데 바로 옆에 지하에 내려가는 건물이 보인다.

새남터 기념관이다.

 

 

 

기념관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걸려진 사진이다.

이땅에 순교의 씨앗으로 천주교의 꽃을 피우신...

기념관은 사진촬영이 금지였고.. 김대건신부님 친필 일기와 유품...들이 있었다.

10분남짓한 이곳 새남터의 역사를 말하는 영상물도 봤다.

눈물한 뚝뚝

그렇게 기념관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