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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가톨릭 성지

[천주교 제주교구 성지] 제주도 관덕정 (제주목관아)

 

제주도교구 천주교 성지 관덕정

제주시 관덕로 19 (삼도2동 983-1)

☎ 064-710-6717

주차장 : 무료

제주교구 천주교 성지 전체 지도 (관덕정 추가)

 

제주교구 사이트에서 찾은 '천주교성지 지도'에는 '관덕정'이 빠져 있었다.

관덕정은 차후에 추가가 된건가??

어쨌든 추가를 해서 다시 만들어본다.

 

제주교구 천주교성지 '관덕정'

네비게이션을 찍고 찾아가보니 목관아 전용 주차장으로 안내를 한다.

무료주차가 가능하다.

 

제주 관덕정

제주 관덕정은 천주교성지로써의 의미도 있지만

보물 제322호 제주관덕정 (濟州 觀德亭)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중 하나로 높은 가치가 높다.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오롯이 본받기 위해 지어진 제주의 대표적 누정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 안무사(安撫使)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한 후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에 의해서 중수되었다. 이 때 쓴 서거정(徐居正)의 중수기에 의하면 관덕정은 "이 정(亭)을 만든 것은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본래 설치함이 무열(武閱)을 위한 것인 즉, 지금부터 제주의 사람은 날마다 이에 사습(射習)하되 과녁을 쏠 뿐만 아니라 기사(騎射)를 익힐 것이요, 기사 뿐만 아니라 전진법(戰陣法)을 익힘으로써 적변(賊變)이 있을 때는 삼읍 백성들이 상산지세(常山之勢)로 수군, 육군, 보병, 기병이 각각 나와서 사력을 다하여 싸워 적군의 목을 베어 이로써 부모처자를 구하고,이로써 한 고을을 보전하며, 이로써 나라의 간성이 되어 역사에 공명(功名)을 세운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그 세운 바를 펼쳐 보였다. 그 후 1599년(명종 14), 1690년(숙종 16),1753년(영종 29), 1779년(정조 2),1833년(순조 33), 1851(철종 2), 1882년(고종 19) 방어사 박선양에 의해 보수되는 등 총 7차에 걸쳐 중수하였고, 이후 1924년 일본인 島司 前田善次가 보수하면서 15척이나 되는 곡선의 처마를 2척이나 줄여 보수하니 전통적인 멋은 사라졌으며, 1969년에 10번째 중수시 대대적으로 해체하여 새로 보수하고 주위에 문을 달아 흰페인트칠을 하여 관덕정의 위용은 사라져 버렸다.

해방후 1948년 9월에 관덕정은 제주도의 임시도청으로, 1952년도에는 도의회 의사당으로, 북제주군청의 임시청사로,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는 등 참으로 순탄치 못한 역정을 견디어 오다가 1959년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관덕정 내부에는 관덕정과 탐라형승, 호남제일정의 현판이 걸려 있다. 실내 벽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는 작자 미상이나, 상당히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내용은 두보(杜甫)의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ㆍ상산사호(商山四皓)ㆍ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ㆍ대수렵도(大狩獵圖)ㆍ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ㆍ홍문연(鴻門宴)ㆍ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다.

 

 

관람료? 관덕정을 가려면 돈을 내야 하나??

아니다.

이건 제주 목관아를 가기위한 관람료 이고

 

관덕정은 목관아 입구 광장 앞에 있다.

그래서 무료로 볼 수 있다.

 

내부에 들어가 볼수는 없지만 둘레를 둘러 볼수 있다.

 

 

바로 이 관덕정 앞 광장에서 1901년 신축교안 때에 수많은 교우와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천주교 제주교구의 역사는 이러하다.

맨 처음 제주에 복음이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1592~1598) 때 일본에 갔다가 유럽 사신들을 따라 제주로 돌아온 김복수가 천주교 교리서 및 기도문을 가지고 와서 복음을 소개하면서부터이다. 또한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이 항해 도중 제주에 표착하였고, 후일 귀국하여 유럽 12개어로 번역 발표한 『표류기』속에서 그가 당시 크리스트교 신자였음을 입증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알려지게 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정난주(마리아, 아명 명련)가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면서였다. 1845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성인이 제주 앞바다에 표착하였으며, 1858년에는 함덕리 출신의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표류하여 홍콩에 도착한 뒤에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제주 지역에서도 처음으로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기량은 이후 육지를 오가며 성사를 받았으며, ‘제주의 사도’가 되어 이웃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제주 신앙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김기량은 1866년 체포되어 경상도 통영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그로부터 교리를 배워 예비 신자가 된 김이라는 사람은 박해를 피해 살아났으나 1899년에 사망하였다.

제주 지역에 복음이 다시 전파된 것은 당시 제주 중문 색달리 출신인 양용항(베드로)과 이 라우렌시오가 육지를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1898년 4월경에 세례를 받고 제주로 돌아와 신 아우구스티노와 바오로 형제, 김생원 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제8대 조선교구장 민 아우구스티노(G. Mutel, ) 주교가 제주본당의 설립과 성직자 파견을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제주본당(현 제주 중앙 본당)의 설립은 1899년 4월 22일 발표되었다. 동시에 수원 갓등이 본당(현 왕림 본당)에 재임하던 배 카를로(C. Peynet) 신부와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새 신부가 제주에 임명되어 5월 26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제주에는 제주교회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초기 제주교회는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여 1901년 초에는 영세자 240여 명, 예비 신자 7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01년에 신축난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신자는 물론 양민까지 포함하여 7백여 명이 관덕정 광장에서 죽음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때 사망한 신자들의 시신은 화북천 주변에 묻혀져 있었다. 1903년 조정에서는 아라동 부근 황무지를 매장지로 결정하여 옮겨 묻도록 하였다. 이곳이 현재의 황사평 성지이다.

한일합방은 제주교회에도 시련을 안겨 주었다. 성당이 폐쇄되고 성직자, 수도자들이 투옥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당시 이 고장 선교를 담당했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들의 노력으로 교회 재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4·3 사건(1948) 등 의 사회적 혼란이 교회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교회는 수많은 피난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을 비롯한 신자들을 수용하여 대성시를 이루기도 하였고, 또한 그들의 힘을 얻어 선교 활동에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가톨릭 구제회를 통한 구호 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런 사업들에 힘입어 점차 제주본당의 자본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1971년 제주지목구로, 1977년 제주교구로 승격하게 되었다.

 

 

 

 

관덕정(觀德亭)

관덕정기에 의하면 안평대군의 글씨로 적혀 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안무어사 김상헌의 일기인 남사록에는 안평대군의 편액은 불에 없어지고

지금 걸고 있는 것은 아계(李山海, 이산해)의 글씨이다 하였다.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1882년(고종 19) 방어사 박선양(朴善楊)이 중수하면서 쓴 글씨이다.
 
탐라형승(耽羅形勝)
중앙 천정 서쪽에 동쪽을 향하여 걸려있는 편액인데
이는 1778년 12월부터 1781년 3월까지 재임한 방어사 김영수(金永綏)의 글씨이다.

 

관덕정 뒷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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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983-1 |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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