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구 천주교 성지순례] 황사평 성지
본문 바로가기

가톨릭/가톨릭 성지

[제주교구 천주교 성지순례] 황사평 성지

 

황사평 천주교성지

제주시 화북2동 5662-1

황사평 관리사무소 ☎ 064-721-0146

 

 

천주교 제주교구 성지

 

관덕정 https://simjuliana.tistory.com/2598

대정성지 https://simjuliana.tistory.com/102

황사평성지 https://simjuliana.tistory.com/2605

새미 은총의 동산 https://simjuliana.tistory.com/101

김기량 펠릭스 현양비 https://simjuliana.tistory.com/2604

용수성지 https://simjuliana.tistory.com/2627

황경한 묘소

 

황사평 천주교성지?

'이재수 난' 또는 '신축교안()' 때 죽은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묘지로 조성된 것이 그 기원이다.

이재수 난 당시 피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로 300~350명 정도였는데,

이들의 시신은 별도봉 밑에 가매장한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1903년 프랑스공사와 조선 정부의 교섭이 이루어져 황사평()을 묘지로 제공받았다.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장해간 상태였으므로 무연고 시신들만 황사평으로 이장하였다.

그 뒤 천주교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해왔다.

1983년부터 공원묘지로 조성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천주교 제주교구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성역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무연고 묘지를 정리하고, 이재수 난과 관련된 희생자들의 묘를 옮겨오고,

파리외방선교회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을 위한 공덕비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비 등을 세움으로써

1998년에 마무리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성지로 향한다.

 

입구의 성모상

 

황사평 성지 안내소

 

 

스탬프가 있다.

 

저멀리 성가정상이 보인다.

 

이어지는 길이 참 아름답다.

 

좌측에는 납골당이 있고

 

공원묘지도 있다.

정면에 순교자 묘역이다.

 

1901년 5월 5일, 제주도 남쪽의 대정지역에서는 '상무사'(商務社) 회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난행하기 시작하였다. 상무사는 지역민들이 설립한 사설 단체로 천주교 세력이 퍼져 나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던 터에 부당한 세금, 지방민과 교인들의 알력, 서양과 일본 세력의 제주도 진출 등이 문제가 되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제주의 신축 교안(辛丑敎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박해 이후 한 명의 신자도 없던 제주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8년 4월 22일 '제주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Peynet, 배)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제주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페네 신부는 육지로 전임되고 라크루 신부가 새로 부임하였으며, 김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함으로써 새 본당을 설립하였다. 김원영 신부의 활동은 실로 눈부셨다. 그의 전교 덕택에 교안 발발 직전까지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신자 수 241명, 예비신자 수 62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교안은 5월 5일부터 6월 초까지 20여 일 계속되었다. 처음 상무 사원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피정차 육지에 나와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피정 중에 인사 이동을 결정하여 김원영 신부를 육지에 남기는 대신 무세(Mousset, 문) 신부를 한논 본당에 임명하였다. 5월 10일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는 제주에 들어가 제주성에 갇혀 있는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하였으며, 5월 28일에는 제주성이 난민들에게 함락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학살되었다.

  폭도들은 그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여자 교우들의 새로운 학살 소식과 화재 소식이 도처에서 들려왔습니다. 김원영 신부의 회장인 박 고스마는 묶인 채 매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 그 곳에 저의 복사 아우구스티노가 있다가 도망쳐 왔습니다. 동헌 마당으로부터 거친 소리들이 들려왔고, '천주교 아이놈은 어디에 있느냐?'는 외침도 들렸습니다. 벽장에 숨어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아, 하느님, 제 아이가 잡혔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했고, 폭도들은 그 아이의 빰에 총을 들이대고 여러 차례 발포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시여 … 예수님, 성모님 …."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여 살해되었습니다(라크루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01년 6월 11일자 서한).

교안의 결과 천주교 신자와 예비신자 중에서 약 300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기록의 미비로 신자와 비신자, 순교자와 단순 희생자를 규명해 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라크루 신부의 다음 기록을 빌리면, 복사 신재순(아우구스티노)과 같은 경우에는 신앙 증거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18세의 젊은이로 순진하고 양식을 갖춘 가톨릭 신자였고, 천사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헌신적이었고, 그 밖에도 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위의 서한 참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뒤 교안 희생자들의 시신은 관덕정 앞에 모아졌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때 연고가 없는 시신들은 5월 말에 일단 사라봉(제주시 화북동) 아래에 묻혔다가 2년이 지난 1903년 4월에 매장지가 황사평(당시 화북 2동의 황새왓)으로 결정되면서 모두 이 곳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제주 신자들은 황사평을 순교자 묘역으로 생각하여 해마다 현양 행사를 개최해 왔으며, 1995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한곳에 모은 합장묘를 조성하면서 묘역을 새로 단장하여 순교 사적지로 가꾸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4호(2000년 3월호), pp.76-77]

야외 제대

황사평 순교자 묘역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비

 

 

외국인 선교사 공덕비

현 하롤드 대주교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