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티 순교성지 (살티 공소)
김영제 베드로와 김 아가다 묘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11 (덕현리 1144-3번지)
☎ 언양성당 052-262-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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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울산 살티 순교성지
김영제 베드로와 그의 여동생 김 아가다 묘
양반 가문의 김영제 (金永濟 1827~1876) 베드로는 9개월이나 감옥에 갇혀서
배교를 강요당하고 종지뼈가 으스러져 떨어져 나가는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혹독한 장독이 전신으로 퍼지고 상처 부위에는 항시 피고름이 흘러
한겨울에도 바지를 걷고 진물을 받아내야 하는 고통속에 살다가
결국 1875년 숨을 거두었다.
김영제 (베드로)의 동생인 김 아가다
그녀는 김영제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도망쳐 나와
최양업 신부가 있는 죽림굴에 은신하며 최신부를 도왔다.
체포되었던 후유증으로 여러날 앓다가 선종하였다.
살티 순교성지 초입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살티공소
살티공소는 부산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로 1868년에 설립된 곳이다.
언양지방에 간월공소(1815~1860)가 무너지자
거기에 살았던 신자들이 더 깊은 안살티로 들어와 정착하다가 점차 박해가 뜸해지면서
논밭을 경작할수 있는 살티로 옮겨와 살티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 살티는 최재선 주교, 김문옥신부, 이종창신부, 김윤근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살티 라는 말의 유래는
당시 관원들이 교우들을 찾아 석남사까지 왔다가 경주로 빠져나감으로써
이곳의 교우들이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살아남아
"살 수있는 터" 라고 해 [살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살티 공소안으로 들어가본다.
공소를 나와
김영제 베드로와 김아가다 묘가 있는 순교성지로 향한다.
살티공소에서 약 500m정도 떨어진곳이다.
성지입구에서 부터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살티순교성지
이곳 살티 순교성지에는
김영제 베드로와 그의 여동생 김아가다의 묘가 있다.
원래는 김영제 베드로의 묘만 있었고
이후 옛 간월공소 뒷산에 있던 김아가다의 묘를 이장해 온것이다.
천주교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의 묘
1827.06.17 ~ 1876.01.24
김영제(1827~1876,베드로)의 조부인김교희(1775~1834, 프란치스코)는
그의 육촌 오한우(1760~1801, 베드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의 활동 인물인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등
양반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익히고 영세한 후,
1801년 신유박해를 당하여 언양의 간월골로 피신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다.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로 간월을 떠나
경북의 자인골, 청도 정자동, 월성군 탑곡 등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디어진 1850년 12월 다시 간월의 불당골로 돌아왔다.
간월로 돌아온 김영제는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 및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신부를
맞이해 공소를설립하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짓기도 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 간월골에서 부친(김상은)과 여동생(동정녀 김 아가타)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된 김영제는 경주부(慶州府)로 이송되어
중죄인으로 분류돼 대구 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풀려났지만 다시 무진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7월 김영제는 두 번째 체포되고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해 그는 종지뼈가 으스러져 떨어져나가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1869년 봄, 마침 나라에 경사가 있어 특별히 사면되어 죽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흩어진 가족들을 수소문해 안살티에 정착한 그는 여기서 다시 공소를 설립해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의 살티로 옮겨와 살게 된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결국 1876년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천주교 동정녀
김아가다의 묘
1836~1860
동정녀 김아가다 (1836~1860)는 김영제 베드로의 여동생이다.
간월골에서 살던 동정녀 김 아가다는 언양의 첫 신자 김교희의 손녀로
경신박해때 아버지(김상은 야고보)와 오빠(김영제 베드로)가 잡혀가자 뒤를 따르고자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포졸들이 다른 데로 팔아넘기려 하자 도망쳐 나와 최양업 신부가 있는 죽림굴에서 은신하며 지냈다.
여기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바깥소식을 전하고 식사준비와 빨래 등으로 최신부를 정성껏 공경하였다고 전한다.
최신부는 짚신을 삼고 교우들은 이것을 팔아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잡혀 갔던 후유증으로 여러 날 앓다가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아가다는
최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24세에 선종 하였으며, 둘러 있던 교우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최신부는 시신에다 솔가지를 덮고 묘비인 패장을 세워 주었으며 며칠 후 교우들이 간월골로 옮겨와 매장 하였다.
김 아가다의 아름다운 생애는 구전으로만 이곳 신자들에게 전해오고 있었는데,
최양업신부가 1860년 리보아 신부와 르그제조아 신부에게 보냈던 편지에 그녀가 소개되어 있음이 후에 확인되었다.
“24세 된 동정녀가 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히 비상하여 모든 교우들중에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 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하기를 원하더니...”
간월무덤에서 최근에 유해를 살티 순교자묘역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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